성공했는데도 허무할 때… 채워야 할 것은
유진우 / 연극인
“지금은 내가 널 필요로 하지만, 프랑스, 나중엔 네가 날 필요하게 만들겠다.” 1995년, 파리로 유학 갔을 당시, 가난한 마임이스트 유진우는 에펠탑에 올라 이렇게 다짐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는 세계적인 연극학교 ‘에꼴 자끄 르꼭’에서 동양인 최초의 교수가 된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젊은 연극인들에게 ‘움직임 연기’를 가르치며 최고의 명장에게 붙이는 호칭, ‘마에스트로’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던 그. 하지만 그에게 정작 몸과 마음의 이치를 깨닫게 해준 건 마음수련이었다.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숙제를 풀고 싶었다
전북 정읍의 산골마을, 이미자 같은 인기 가수의 창가를 곧잘 따라 하는 소년이 있었다. 그런 손주를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게 낙이었던 할머니는 어린 손주가 자라서 가수가 될 거라 믿으셨다.
무엇을 흉내내든 그의 몸짓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고교 선생님은 연극과를 권했다. 연극과에 들어간 뒤, 자신의 관심사와 재능에 눈을 뜬 그는 강의가 끝난 뒤에도 남아 탈춤과 아크로바틱, 스트레칭, 물구나무에 이르기까지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신체를 단련시키며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1992년, 마임 전문 배우로 데뷔한 유진우 씨. 제법 이름도 알려지고 활동 영역도 넓혀갔지만 그의 마음 속엔 늘 뭔가 부족함이 있었다.
“무대에 설수록, 인정을 받을수록 ‘속은 비어 있는 것 같은 부족함’이 느껴졌어요. 몸은 자유자재인 것 같은데 마음과 하나가 돼 있지 않은 것 같았죠.”
마임의 본고장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결심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가 들어간 ‘에꼴 자끄 르꼭’은 현대 연극배우 자끄 르꼭(Jacques Lecoq)이 1956년 설립한 국제적인 연극학교. ‘움직임과 행동’을 집중 교육하는 이 학교는 배우는 물론 작가, 연출가 등 세계 최고의 연극인을 배출하는 곳으로 명성이 높다.
“우리가 필요한 건 유진우인데, 그가 한국인일 뿐이다”
어떤 움직임이든 한 번만 보면 거의 그대로 복사해놓은 것처럼 표현하는, 유진우 씨는 45년 학교 역사상 겨우 40여 명만이 통과하는 지도자 과정을 동양인 최초로 통과한다. 당시 ‘움직임 연기’를 직접 가르쳤던 스승이자 학교장으로 99년 타계한 자끄 르꼭은 “유, 넌 이제 내 동료 교수야”라며 기뻐했다. 2년 후엔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초빙교수가 된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정부는 그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교수 임용을 반대했다. 이때 학교 측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건 유진우인데, 그가 한국인일 뿐이다”라 했던 건 유명한 일화다. 그는 ‘성공 신화를 이룬 한국인’으로 국내에 알려졌다. 하지만 ‘최고’의 찬사를 받아도 숙제는 여전했다. 풀지 못한 숙제, ‘아직 채워지지 않은 듯한 부족함’을 해결해준 건 마음수련이었다고 한다.
2002년 5월 초, KBS 1TV <한민족 리포트>를 통해 그의 이야기가 한국에 전해지자, 한 여성이 서울에서 이메일을 보내왔다.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를 재미있고, 특별하게 표현해내는 그녀에게 그는 자꾸 친근감이 갔다.(그녀는 훗날 그의 아내가 된다.)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한 가지, 그의 마음에 강하게 남는 게 있었다. ‘마음을 비워보니 세상 모든 것과 하나 되더라’는 그녀의 말이었다.
마음 버리며 오랜 숙제 풀고, 몸 마음이 하나임도 체득해
“그것은 몸으로 사물을 표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거거든요. 하지만 나는 상상만 해보았을 뿐, 체득해보지 않았어요. 당연히 큰 관심이 생겼죠.”
마침 이듬해 파리에도 마음수련원이 생겨, 그는 주저 없이 수련을 시작했다. 마음을 버리며 몸과 마음이 ‘원래’ 하나였음을 체득한 그는 자신이 풀고자 하던 숙제보다 더 중요한 인생의 의문까지 풀었고, ‘일밖에 몰라 방치해두었던’ 내면을 성찰하게 되었다.
최고가 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세월들이 사진처럼 주르륵 떠올랐다. 살아온 삶의 매 순간들이 오로지 자신밖에 모르는 욕심과 집착의 시간들이었고, 버려야 할 허상의 사진들이었다.
“참으로 산 게 아니었더라구요. 속이 비어 있다, 허전하다 느낀 건 실력을 채우라는 게 아니었어요. 본성을 참으로 채우라는 거였는데, 그걸 마음수련하고서 깨달았죠. 참의 마음이 돼 있지 않으면 어떤 일도 완전할 수가 없어요.”
그는 마음수련을 한 후 비로소 인간다워졌다고 말한다. 예전엔 워낙 고집이 세고 내가 옳다는 틀이 강해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단다. 교수시절 초기엔 학생들의 질문도 잘 받아주지 않을 정도였다. 누군가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존심이 상해 열불이 났다”는 그는 무슨 일이든 혼자서 고민하고 해결하려 했다. 지금은 누구의 이야기든 ‘아, 그래요’ 하며 듣고 의논도 할 줄 아니,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신기하다는 그이다.
욕심 없이 최선 다하는 자신 보며, 이제야 철들었음을 실감
그는 ‘잘나가던 교수 유진우’도 버렸다. 6년간의 교수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오기로 결정할 때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지 마음을 먹었던 그였다. 하지만 막상 돌아와 보니 그 유명한 유진우를 알아주는 곳은 드물었다. 예전의 그라면 자존심 때문에 되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마음엔 여유가 있었다.
“움직임 연기가 한국에선 아직 낯선 분야이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들은 자존심 등 아직 벗어나야 할 마음들이 남아 있나 돌아보라고 주어진 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국립예술단과 국민대에서 움직임과 연기를 가르치고 있다는 유진우 교수. 그는 그냥 세상의 한 사람으로서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알며, 욕심 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이제야 철이 들었음을 실감한다고 한다.